7월 3일 (일) 백중기도 초재 / 7월 10일(일) 백중기도 2재 / 7월 13일 (수) 포살법회 / 7월 16일 (토) 지장재일 / 7월 17일 (일) 백중기도 3재

서브컨덴츠 시작

말사소식

통도사 말사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울산저널]서화(書?)의 보고, 통도사 사명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817회 작성일 16-11-19 09:10

본문

서화(書)의 보고, 통도사 사명암

이병길 (사)영남알프스천화 운영위원장   2016-11-17

 

우리는 시간의 존재이고, 그 시간의 가운데에 있다. 시중(時中)적 존재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늘 우리는 그때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 단풍을 보기

위해서도 또는 정치적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때를 잊거나 놓치게 되면 다시 그때를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단풍도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단풍시절, 단풍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만, 촛불 민심은 위로 올라간다.

 

1601

전원적 풍경을 가진 사명암은 영화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우측 정자가 일승대이다. 이곳에서 불교예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1602

사명암 영각 앞의 불타는 단풍나무 아래 장독은 무작정의 멋을 뽐내고 있다.

 

 

단청, 불화, 서각의 멋이 있는 사명암

 

나무 한그루에서 온전히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통도사 사명암이다. 단풍나무 두 그루가 좌우에서 온몸을 붉히면 비로소 영축산에 가을이

온다. 통도사 암자 중에서 가장 전원적인 풍경

을 자랑할 만한 곳인 사명암은 불교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단청과 탱화 제작의 산실이다. 또한, 다양한 현판과 주련 글씨를 볼 수 있어 통도사

암자 중에서 서예의 보고(寶庫)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명암은 서화(書畵)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사명암에는 두 개의 정자, 월명정과 일승대가 있다. 사명암의 가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월명정과 일승대의 단풍나무 때문이다. 정자에서 단풍

잎을 연못으로 날리면 마치 꽃이 바람을 타

고 가는 듯하다. 이 단풍나무는 일품이다. 가을이면 어린아이 손바닥처럼 귀여운 잎은 통도사 단풍나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뽐낸다. 그 붉디

붉은 잎은 마지막 계절을 보내는 정열이다.

단풍 없는 가을은 끔찍할지 모른다. 가을 나무의 단풍은 붉은 것만이 아니라, 은행나무처럼 노랗게, 느티나무처럼 갈색으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단풍

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란 말처럼 붉은 때

가장 아름답다. 가을날 하늘은 푸르고 나뭇잎들이 산하를 붉게 그리고 노랗게 물들일 때 진정 가을의 제멋을 느낄 수 있다. 깊은 가을 사명암 단풍나무

는 붉은빛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1603

사명암 극락보전은 단청의 멋과 불화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현판과 주련은 월하스님의 글씨이다.


사명암 영각 건물에는 혜각스님(慧覺, 1905~1998)과 사명당 송운대선사를 모셔놓고 있다. 혜각스님은 불모(佛母)이다. 불모란, 불화나 불상을 조성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컬으며, 금어(金魚)

라고도 한다. 혜각스님은 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었다. 죽은 나무기둥에 꽃을 피우는 일을 하셨다. 율사(律師)이자 선사(禪師)였던 스님은 돌장승

이라도 신세를 지면 꼭 직접 갚았으며, 서릿발

같은 수행으로 계율을 어기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자비 보살’이자, ‘엄한 나한’이었다. 혜각스님은 금초(金草) 12종 기법과 금단청 등 독창적

인 단청기법으로 유명하며, 불교의 경전을 그

림으로 옮기는 탱화와 서예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일승대는 서각의 보물창고이다

 

사명암의 일승대는 늘 차향 가득하지만, 서예의 묵향 가득한 전시장이다. 일승대는 동원스님이 주로 사용하는 다도실이다. 육각정의 건물 내부의 기둥

과 도리에 현판이 걸려있지 않은 곳이 없다.

현판의 글씨는 어떤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현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글씨 형태가 있다. 일부 글자는 전서와 초서이다. 총 20개의 현판을 달아놓았다.

일승대(日昇臺),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곳이기에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글씨는 혜각스님의 것이다. 요사채 마당 정면에서 보이는 현판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이다. 묵선자 박지명의 글씨이다.

일승대와 욱일승천에 동시에 보이는 ‘일승’이

란 글자는 혜각스님의 은사이신 회명(晦明)스님의 호이다.


일승대 정자의 바깥쪽에 붙은 현판을 오른쪽으로 살펴보자. 물론 현판은 정자 내부에 걸려있다. 첫 번째는 욱일승천 안쪽에 있는 “석수실(石壽室)”은

추사의 글씨체이지만 낙관은 없다. “석수만

년(石壽萬年)”, ‘돌의 생명은 만년 간다’에서 온 것이다. 만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돌과 같이 장수를 기원하는 글이다. 회갑 때 즐겨 쓰는 말이다. 두 번

째는 경봉스님의 “금강대(金剛臺)”이다. 세

번째는 청남 오제봉의 글씨로 소전체(小篆體) 글씨이다. 정미년 1967년 초여름 상순(上旬)에 쓴 글이다. “夜有夢者不入(야유몽자불입) 밤에 잡 꿈이

많은 자는 들어오지 말라. 口無舌者當住(구무

설자당주) 입에 혀 없는 자는 마땅히 머물 수 있다.” 이 글은 효봉스님이 송광사 삼일암에 있을 때 당시 석두스님께서 준 글귀이다. 법정스님은,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

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질박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

각이 밖으로 흩어져 안으로 머물 기회가 없

다. 침묵의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오매

일여(寤寐一如),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똑같아야 하고,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잡생각 없음과 침묵이 화두의 기본자세이다.
네 번째는 경술(1910년) 2월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쓴 “강산제일(第一江山)”이다. 이 글은 보물 제569-14호(숭실대학교 소유)이다. 북한에서

2005년 안중근 기념주화를 만들 때 이 글씨

를 넣었다. 다섯 번째는 경봉스님의 “다로경권(茶爐經卷)”이다. ‘차 달이는 화로와 경문(經文)을 적은 두루마리’라는 뜻으로 차와 책이 있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다. 차와 함께 불경을 공부한 스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경봉스님은 조선 찻사발에 말차 대신 잎차를 우려 마셨다. ‘차 다려와라’, ‘차 몇 잔 마셨나’, ‘차나 한 잔 들게나’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시며 평생 끽다거(喫茶去, 차나 드

시고 가시게) 화두를 선필로 즐겨 쓰며 다반사를 실천하셨다. 가장 깊고 오묘한 진리가 고귀한 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는 데 있

다고 하였다. 여섯 번째는 임제록에 임제

스님과 봉림스님의 문답에서 나온 임제스님의 말이다. “孤輪獨照 江山靜(고윤독조 강산정) 大笑一聲 天地驚(대소일성 천지경) 외로운 바퀴(달) 홀로 비추어

강산은 고요하기만 한데, 큰 웃음소리

천지를 놀라게 하네.”

 

1604

추사의 석수실, 경봉의 금강대, 오제봉의 야우몽자불입

 

1605

안중근의 강산제일, 경봉의 다로경권, 임제의 고독윤조

 

1606

혜각의 불심영명, 김구하의 세계일화, 오세창의 산기일석가

 

1607

추사 김정희의 대몽각, 대호쾌활, 일화오엽루

 

붓글씨와 칼의 조화가 서각이다

 

이제 일승대 정자 안쪽 대들보에 걸려있는 현판을 오른쪽으로 읽어보자. 첫 번째 “불심영명(佛心永明)”은 ‘불심은 밝고 오래간다.’는 의미이다.

요사의 주련과 필체가 같은 구루비문 글자체이다. 두

번째는 “세계일화(世界一花)”로 일제강점 시절 독립군 자금을 남몰래 지원하고 통도사 주지를 하였던 축산 김구하 스님의 글씨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세계만물이 꽃처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면 질투를 넘어, 차별을 넘어 세계가 한 송이 꽃으로 필 때 세계는 꽃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세 번째는 도연명의 음주시 일부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글이다.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산 기운은 해 질 녘이 더욱 아름답다.


네 번째는 만해 한용운의 글씨인 “전대법륜(轉大法輪)”이다. ‘거대한 법(진리, 가르침)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 사물만이 무상(無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옳다고 믿는 진리도 무상(無常)한 것이다.

현판에는 만해의 낙관인 만해(卍海)가 뚜렷하다. 다섯 번째는 논어의 첫 구절인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시습제

(時習濟)”이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에 가면 시습제가

있다. 글씨의 주인공은 알 수 없다. 여섯 번째는 ‘산에 지은 정자’라는 뜻을 가진 “산정(山亭)” 현판이다. 산봉우리에 정자가 당당하게 서 있는

형상이다. 글쓴이는 성암(省菴)이다.


일곱 번째는 해강 김규진의 글로 “간묵당(簡堂)”이다. 간묵이란, 말수가 적고 태도가 신중하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신임

수령의 자세로 논한 바 있다. 아마 이 정자에 오르면

주위의 적연(寂然)함에 자연스럽게 입은 다물고 행동은 신중하게 될 것이다. 공자는 말을 잘 꾸미는 사람을 싫어했다. 그리고 말보다 행동할

것을 주장했다. 선행기언(先行其言) 이후종지(而後從之).

그 말에 앞서 행하고, 행한 이후에 말은 그 행동을 따라야 한다. 여덟 번째 글은 “겸와(謙窩)”이다. ‘겸손함을 감춘다’ 또는 ‘겸손의 공간’이라

는 뜻이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겸손은 남을 존중

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이다. 항상 겸손의 움집에 머물게 된다면 자연히 내가 남을 존중하듯 타인도 나를 존중할 것이다.
아홉 번째는 “무진장(無盡藏)” 현판이다. 불교에서는 덕이 광대하여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원융무애(圓融無碍)와 같은 의미

로도 쓰인다. <유마경> ‘불도품’에서는 “빈궁한 중생을 돕는

것은 무진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보살은 가난하고 궁한 자들에게 무진장을 나타내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생기게 한다.”고 하였다. 글씨는

진성(眞性)의 것이다. 열 번째 현판은 추사의 “대몽각(大夢覺)

”이다. 인생의 큰 꿈을 깨우치고 무명의 꿈 그림자를 타파하는 대몽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조신의 꿈’과 관계있다. 연인을 사랑하게 된

스님 조신에게 관세음보살은 한편의 꿈을 주어 무명(無明)이 만

들어 낸 세계가 꿈인 줄 깨닫게 하고, 그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대몽각(大夢覺)의 가르침을 준다. 열한 번째 현판은 “무(無)”이다. 없음이다.

글씨도 독특하지만, 일승대 현판 중에서 가장 멋진 서각(書刻)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입으로 붓을 물어 쓴 글씨로 구필(口筆)서예가 동해어부(東海漁夫) 김동술(金東述)의 작품이다. 


열두 번째 현판은 추사의 “일화오엽루(一花五葉樓)”이다. 달마대사가 설중단비(雪中斷臂), 눈 속에서 팔을 자른 혜가에게 천축에서 가져온

낡은 붉은색 옷과 음식 담는 그릇을 전하는 게송에 나온다. 한

송이 꽃에 잎이 다섯 개.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되어 진다. 하나의 해석은 “달마대사로부터 다섯 명의 제자(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를

거쳐 선종의 가르침이 천하를 덮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인 혜능에게 꽃은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다. 또 다른 해석은 선종의 육조 혜능 스님이 이룬 한 송이 깨달음의 꽃에서 위앙종, 임제종,

조동종, 법안종, 운문종 등 오종(五宗) 또는 오가(五家)의 잎

이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판에는 과노(果老)와 김정희라는 낙관을 같이 볼 수 있다.

 

1608

사명암 요사에는 이익이『성호사설』에서 “그 형상이 벌레가 갉아 먹는 것도 같고 새가 지나간 자국과도 같아서 얽히고 맺히고 깎이고 황홀하고

기괴하다”라고 한 구루비문체 주련이 있다.

 

단풍도 떨어지듯 시간의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서각은 글씨를 새기는 것이다. 문자와 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미를 창조하는 것이 서각이다. 부드러운 붓의 흐름을 칼로써 새겨나가는 것이다.

이질적인 만남이다. 먼저 붓의 부드러움이 만들어진다.

그다음에 칼날에 의해 글씨는 입체감을 부여받는다. 칼 맛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제 글씨는 살아 꿈틀거린다. 그래서 붓의 흐름이 더욱 두드러진다.

붓글씨가 칼을 만나 때론 날카롭게 때론 부드럽게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다. 글씨 획의 강약 리듬에 맞추어 힘준 곳은 깊이 파고, 흘러내리듯 그은 것은 얕게 새겨 붓글씨의 울림을 입체화시키는 것이다.

붓글씨의 평면화를 입체화하는 서각인의 손놀림

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사명암의 구루비문은 더욱 그러하다.


사명암을 내려오는데 가을 단풍이 깊다. 기행은 끝났다. 가을 단풍은 영원히 붉음을 자랑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떨어진다. 그것이 시중(時中)이다.

떨어질 단풍이 떨어지지 않으면 빛바래 아무도 바라

보지 않는다. 추할뿐이다. 가을은 그러한 시절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텔레그램 보내기
  • 텀블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