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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교신문]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25>창녕 관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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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03회 작성일 19-05-0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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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5> 창녕 관룡사

“세속의 권력으로는 정토에 이르지 못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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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산 아래와 저 멀리 낙동강을 굽어보고 조성된 용선대와 불상.

서로 다른 방식으로
淨土 꿈꾼 두 사람


아홉 龍 절복한 원효
천명승려 화엄경 강설 


절 입구 옥천사지는
개혁 이끈 신돈 인연


경상남도 창녕(昌寧)은 ‘작은 경주’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역사문화 도시다. 한반도 남부의 젖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여 평야가 너르고, 기암괴석의 높은 산이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을 따라서 남해안과 내륙 깊숙한 곳으로도 갈 수 있는 교통 요지다. 비옥한 농토, 풍부한 수량, 내륙과 해안, 동과 서를 잇는 지리적 위치, 넓은 강과 높은 산이 만들어 준 천연요새를 갖춰 한 나라의 수도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대 가야연맹 중추였던 비화가야(非火伽倻)가 창녕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신라에 병합된 후에도 경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녀 하주(下州)라 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창녕읍내 곳곳에서 만나는 가야시대 고분과 경주 불국사 3층 석탑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술정리 동서 3층 석탑을 비롯한 많은 불교문화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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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전경


관룡사(觀龍寺)는 창녕을 대표하는 고찰이다. 용을 본다는 뜻의 절 명칭은 원효대사와 관련이 있다. 원효대사가 이 절에 머물며 승려 천명에게 화엄경을 강설했다.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100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영롱한 오색채운(五色彩雲)이 뻗치고 아홉 마리의 용이 화왕산 마루의 세 연못으로부터 등천(登天)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홉 마리의 용을 절복(折伏)하여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통도사 창건 설화에서도 만난다. 용은 주로 토착세력을 상징한다. 제각기 다른 자연신앙을 신봉하던 부족이 강력한 중앙집중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교는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데올르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접경지나 구시대의 정신적 터에 사찰이 많이 들어섰다. 용(龍)의 전설은 그 상징이다. 

불교가 왕권과 지배세력의 통치 이데올르기를 제공하고 스스로 권력이 된 승려도 있었지만 권력마저 벗어던지고 중생과 함께 했던 수행자도 많았다. 원효가 그러했다. 삼국통일전쟁 전후에 주로 활약한 원효는 패전국을 찾아 전쟁에 패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기도했다. 백성의 입장에서 신라 백성이든 가야 백성이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 없는 평화, 한 가족 먹고 살 수 있는, 그야말로 송곳 하나 꽂을 정도의 땅, 그리고 함께 어울려 사는 이웃이다. 왕조를 바꾸는 전쟁은 아무리 치장을 해도 죽음 위에 세운 어둡고 탁한 악세(惡世)일 뿐이다. 

무한한 생명과 무량한 광명으로 장엄한 극락정토는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나 남을 딛고 일어서는 권력이 아니라 삿된 번뇌를 벗어던진 지혜와 자비 뿐이다. 원효가 성사(聖師)로 존경 받으며 영원히 빛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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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절복하고 세운 절 

지난 4월7일 창녕 관룡사를 찾았다. 관룡사(觀龍寺)는 ‘작은 경주’ 창녕을 대표하는 고찰이다. 관룡사 가는 길은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으로 선경(仙境)을 자아냈다. 일요일 오후인데도 서울 부산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벚꽃 터널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길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웃으며 내려오고 경내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관룡사는 소박하고 아늑했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은 깎아지른 듯한 수직암벽이 장엄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소박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절에는 오랜 역사에 걸맞게 많은 성보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하나 하나가 더 없이 소중하다. 

보물 제212호 대웅전은 보물 제1730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모시고 있다. 벽면 전체를 채워 그린 관음보살 벽화는 보물 제1816호다. 모두 임진 병자호란 이후 인조 효종 시절에 조성했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선 약사전은 대웅전과 방향이 다른 점이 특이하다. 관룡사는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탔지만 용케 이 약사전만 화재를 면했다. 

그 앞에는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석탑이 서있다. 석탑 앞 담벼락을 기대고 선 작은 벚꽃 한 그루가 빛바랜 흑백사진 속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선 듯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머물게 한다. 약사전에서 나온 상량문에서 이 건물이 353년 처음 건립돼 1507년(조선 중종2), 1609년(광해군1), 1821년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약사전 안 보물 제 519호 석조여래 좌상은 772년 조성된 명문이 나왔다. 

백미(白眉)는 누가 뭐라 해도 관룡사 경내에서 500m 위에 자리한 용선대(龍船臺)다. 산봉우리 정상에 대불좌상이 관룡산 아래와 저 멀리 낙동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 광경은 장엄하면서도 눈물이 날 정도로 환희심을 자아낸다. 부처님의 가피가 온 몸을 감싸는 듯 한 감동이 밀려온다. 

서 있는 곳이 산이 아니라 뱃전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용선(龍船)은 반야용선의 준말이다. 어지럽고 고통 속의 이 땅에서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배라는 뜻이다. 그래서 용선대는 극락으로 가는 배의 조타수다. 보물 제295호 ‘창녕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722년 무렵 조성했음이 명문을 통해 밝혀졌다. 

용선대를 뒤로 하고 산을 오르면 관룡산이다. 관룡산을 지나 그 옆 화왕산을 가면 관룡사의 사격이 더 분명하게 와 닿는다. 발 디딜 곳 없을 것처럼 뾰족한 암벽이 병풍처럼 두르는데 산정상은 넓은 벌판이다. 그 유명한 화왕산 억새밭이다. 복원한 성(城)이 가장 자리를 따라 서있고 가운데 우물 한기가 있다.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그 우물이다. 성 위에 서면 창녕 일대 낙동강 일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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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과 고려시대 탑 모습.

창녕, 물자 모이는 집산지며 요지

창녕은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쪽 끝 심심산골 그 높은 곳에 웅장한 석조좌상을 조성한 배경이다. 요즘 기술로도 쉽지 않은 대형 불사는 풍부한 물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관룡사가 불교국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불사가 끊이지 않은 것도 이러한 자연지형, 풍부한 경제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일까? 창녕의 사찰은 고려시대 수도 개경과 직접 맞닿았다. 지금은 폐사된 창녕 인양사가 고려 왕경의 봉덕사 영흥사 천암사 보장사 등에 많은 양의 곡식을 시주한 기록이 나온다. 

장일규(동국역사문화연구소)는 이에대해 “창녕이 낙동강 유역의 대표적인 전략요충지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인양사로 대표되는 창녕 일대의 사찰은 왕경의 사찰이나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법하다”고 주장했다. (2017, 관룡사의 역사) 

지리적 중요성, 풍부한 물자, 강과 바다 육지 등을 통해 전국으로 이어지는 교통망이 남쪽의 변방을 중앙정부와 잇는 동맥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녕의 사찰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돈(辛旽)이 고려 중앙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배경을 짐작케 한다. 신돈은 관룡사 입구 옥천사(玉泉寺)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이 지역 명문가 영산 신씨(辛氏)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옥천사 노비였다. 일부에서는 신라 말 화엄십찰 중 하나인 옥천사로 주장한다. 

신돈은 화엄행자였다. 그는 실천적 성향이 강한 화엄 신앙 중에서도 대중적 성격의 문수신앙을 따랐다. 공민왕이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이라고 평한데서 보듯 신돈은 파벌도 없고, 주류와도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였다. 공민왕은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세우고 땅에 떨어진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깨끗하고 개혁적이며 신진이라는 이들도 금세 시류에 물들거나 부에 넘어가고 파벌과 인맥에 휘둘렸다. 

공민왕이 신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신대족(世新大族)은 친당(親黨)이 뿌리를 연하여 서로 엄폐(掩蔽)하고, 초야신진(草野新進)은 정을 속이고 행을 꾸며서 명예를 탐하다 귀현(貴顯)에 이르면 문지(門地)가 한미(寒微)함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에 혼인하여서 그 처음을 버리며, 유생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 좌주 동년이라 하여 칭하고 당차하여 정에 따른다. 삼자는 모두 쓰기에 부족하다. 반면 신돈은 욕심이 적으며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니 대사를 맡기면 반드시 마음대로 현적(顧籍) 함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에 대비해도 다르지 않은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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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가로 변한 관룡사 입구 옥천사지 .

신돈 탄생지 옥천사가 인근

공민왕이 신돈에게 “수행을 굽혀 세상을 구할 것”을 청해 신돈은 환속하여 본격 정치에 뛰어들었다. 신돈은 세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첫째 부패척결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적폐청산이다. 조정을 장악하던 대신과 기득권 세력을 하루 아침에 내몰았다. 

두 번째는 인사혁신을 통한 교육개혁이었다. 새롭고 유능한 인물을 정실이나 유력인사의 알음알이로 채우던 관행에서 벗어나 성균관을 통한 공개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개혁했다. 

세 번째는 민생안정이었다. 중인계급을 노비로 전락시키고 상층 계급만 부를 쌓던 토지 정책에 메스를 들이 댔다. 신돈이 승복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이유를 댔던 “간악(奸惡)을 제거하고 현양(賢良)을 등용하여 삼한의 백성이 평강(平康)을 얻게 하겠다”는 원력을 실천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희대의 요승으로 남고 그의 흔적은 땅에 묻히고 삭제됐다. 나고 자란 옥천사는 무덤이 됐다. 

진정한 정토는 어떻게?

신돈은 정토를 꿈꿨던 원효의 원력은 차용하면서도 지혜와 자비로 이루려 했던 방법은 따르지 않았다. 세속의 권력으로는 절대 정토에 이르지 못한다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어긴 셈이다. 그렇다 해도 그의 꿈마저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신돈이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은 조선을 세운 사대부에 그대로 이어졌으니 세간의 모든 노력이 흐르는 물에 비치는 그림자요, 눈으로 우물을 메우려는 헛된 망상이라 해도 세상은 발원(發願)하는 자가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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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 정상의 성과 전설에 나오는 우물.

[불교신문3484호/2019년5월1일자]

창녕=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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